



존엄사라...(이름 참...이전에는 안락사라고 하지 않았었는가?)
첫케이스라고는 하지만...거의 이 어르신의 사망(?)에 이르는 길을 생중계하고 있다...(...)
이게 인간과 관련한 수많은 전제들과 실제적인 활동들이 얽혀있는 문제라...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의학적 규준 (이것도 특정한 문화적 규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및 여타의 규준들이 고려될 것이고 때로는 이것들 사이의 충돌이 있을 수도 있을터이고.
인간의 생명을 유지 내지는 심지어 연장할 수 있는 수많은 도구들이 나와있는 상태에서 "자연상태에서의 주어진 삶"과 "인위적으로 유지되는 삶"사이의 경계를 지을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이면서...
"인간답게" 또 그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당하지 않게"사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 애매한 문제에 대해서 정의를 강요당하는 상황이기도 하며....(어른들이 먹고 싼다고 인간이냐는 말을...혹은 저녀석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도 하시고...)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신체를 처분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또 그 권한(?)을 행사할 주체(?)가 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규준에 대한 정의를 강요당하는 상황이기도 하며...
나아가 실제로 "죽음"을 다루는 사회제도 및 조직의 활동과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한 ethnomethodology적인 연구로는 David Sudnow의 Passing On이 있다. 이 연구에서 그는 병원의 응급실과 시체안치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그야말로 "임박한 죽음" 및 "죽음"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당사자들의 활동을 ethnographic한 방법을 사용하여 관찰하고 분석하였다. 기억하는 자못 충격적이었던 지점중 하나가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가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지 아니면 회생가능성이 있는 환자인지, 다시말하면 회생을 위한 시술을 할 가치가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적용되는 기준이었다. 단순히 진단을 위한 기계들을 통해서 나오는 (객관적) 수치들 만이 그 최초의 운명적 판가름(!)을 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 거기에 그 환자가 누구인가(그 환자가 어떤 사회적, 신체적 카테고리에 속하는가, 그 환자가 어떤 상황을 통해서 이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식별하는 해당 의료요원들의 일상적 지식 혹은 상식(!)이 이 중요한(?)판단에 개입된다는 것이 Sudnow의 작업에 의해서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다.) (추가: 다시 말하면 이 Sudnow의 작업은 Ethnomethodologist들의 많은 작업들이 그러하듯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예를들면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문제...) 보펹거인 그 어떤 해답을 찾으려는 고매한 작업 (철학적인, 윤리학적인...etc)을 그 질문을 실제로 다루는 기존의 인간의 활동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생사의 가능성을 가르는 (가늠하는?) 활동이나 죽음을 실제로 다루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들여다 봄으로써 새롭게 접근한다. 그 구체적인 맥락속에서 이루어지는 해당활동은 다시금 다른 (?!) 구체적인 맥락 (ethnomethodologist들에게는 철학 및 윤리학적 추론들도 그에 속할텐데)에서 해당주제가 어떻게 다루어지는 지를 돌아보는 (!) 일종의 발판의 역할을 한다.)
이곳 독일에서도 이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을 어떻게 처우(?)해야하는지를 놓고서 상당한 의견차이들이 있는데...어제였던가? WDR5에 청취자로서 전화한 어떤 어르신은 단호하게 당신은 침대에 식물인간으로 누워서 다른 사람에게 못할짓을 시키고 못보일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시겠다고 말씀하시던데...벌써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일이 큰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죽음"이 단순한 개인의 판단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 현상이라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긴...벌써 그 어르신께서 다른사람에게 못할 짓, 혹은 다른 사람에게 못보일 모습이라고 하신것도 벌써 그 어떤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아마도 문화적인) 특정한 규준에 비춘 (아마도) 예상가능한 당신의 모습이니...
그러고보니..혹 내가 알고(?)있는 문화권(?)에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자들의 세계 사이에 무언가 어정쩡한 세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그리하여 한동안 죽은자를 마치 산자처럼, 마치 우리들 안에 계속 있는 것처럼 대우해주는 것은...이 애매함(?)에 대한 일종의 해결책(?)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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