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토론 프로그램이나 인터뷰를 진행하는 진행자는 프로그램과 인터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객관성을 견지해야하며 자신의 사견으로 어느한편을 들거나 피 인터뷰자를 반박해서는 안되며 되도록 그로부터 사실에 대한 이야기, 혹은 그 자신의 진실된 입장이나 견해를 끌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코미디나 의도적인 파격을 컨셉으로 하지 않는 이상 위에 제시한 언명(?)은 제대로된 (?) 저널리스트나 대중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이 보여야 할(!?) 바람직한 태도로 생각되어 진다.
그렇다고 토론 프로그램이나 인터뷰에서 꿀먹은 벙어리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은 없는법...악무한적인 정적이나 손님들간의 고성방가 난상토론을 막고 그래도 뭔가 흐름이 있는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서 진행자는 가끔 질문이나 경쟁하는 견해를 소개, 혹은 초대손님들에 의해서 표명된 각각의 주장 및 답변들을 요약하는 형태 (일종의 연출된 반박)로 초대손님들이 말하는 것을 유도하거나 부추김으로써 이들은 방송분량을 채워간다.(:))
이때 특히 이러한 질문들과 연출된 반박(?!)이 진행자의 개인적인 사견이나 임의적인 설정이 아님을 보여주는(?!)데 동원되는 방법이 (이러한 상황 이외에 일상적인 대화상황에서도 사용되는) "인용하기"이다. 즉, 진행자는 그저 스피커일 뿐 (Goffman식 술어를 사용하자면 animator), 다시말하면 저기 누군가 (대다수든, 혹자이든)가 한 질문이나 의견을 전달할 뿐 사견을 개입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accountable하게 display하도록 해주는 그런 장치인 셈이다. 많은 부분 이 장치는 성공적으로 작동하지만 (피 질문자나 손님들이 이러한 진행자의 행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판을 깨지 않고 질문이나 연출된 반대의견에 대한 답을 순순히 해줄 경우...)...또...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행자와 참여자의 역할, 따라서 이 사회적 Scene은 단순히 다소간 잘 정의되고 구조화 된 규칙을 따르는 행위라기 보다는, Conversation analysis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의 식상한 얘기가 되어버린 (그래서 가장 중요함에도 때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TT), member들 사이의 짜고치기, 아니 그보다는 이게 너무 의도적인 냄새가 나니, practical accomplishment라고 이야기 될 수 있다.
손석희씨가 진행하는 100분 토론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생방송 중 인터넷에 올라오는 시청자 의견이나 질문(?)들을 요약(!)하여 소개(! 인용)하는 와중에서 벌어진 문제점(?!)이 뭐 고소를 하네마네 하는 사건으로 비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한번 이 "인용 및 요약" 관행의 실제적인 운용에 새삼스레 주목하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시청자의 반응 및 의견을 충실하게 전달한답씨고 "나 일빠" "나 이빠" 이런 내용을 그대로 내리 읽는 것은 100분토론의 주제에 유감스럽지만 걸맞지 않으니 걸르기는 걸러야 할텐데...때로 어떤 시간이 많은 이는(예를 들면 나같은) 거의 논문을 써댈테니 이걸 다 읽을 수도 없고..., 또 사람들이 모두들 기가막히게 창의적인 것은 아니라 어디서 들은 얘기를 자기 말로 풀어서 쓴 것들이라면 몇십개의 글을 봐도 그게 그 내용이고...그러면 왠지 대표적인 것 하나를 뽑을 수도 있을 듯한데...그렇게 썩 유려한 문장도 아니니 시청자들에게 소개하려면 좀 손을 봐야 할 것도 같고...너무나 한쪽 얘기만 소개되면 그러니 들어오는 글은 적지만 뭔가 반대편 얘기도 "찾아서" 억지로라도 소개해줘야 구색이 맞을 듯하고...누구 얘기는 참신하기는 하나 살짝 삼천포 같으니 맥락에 맞게 손을 좀 봐줘야 할 것같고...
사실 이런 고려들을 하다보면 인용에 있어서의 각색과 요약에 있어서의 재구성은 불가피한 일이다. 자...거기에 누군가가 이 각색과 요약에 적용된 (때로는 암묵적인!...도대체 그게 하나의 목록처럼 정리될 수 있는 것이라는 가정하에...)기준을 하나하나 캐묻기 시작하고, 그 관행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심지어 걸고넘어진다면) 그리고 그 지적이 방송제작자들 측의 안일함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을 넘어 방송판을 깨자는 식으로 진행된다면...글쎄...얘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자꾸 그거 어디서 들은 얘기냐는둥 언제 누구에게서 어떤 상황에서 들은 얘기냐는 둥 자꾸 캐물어서 결국은 본론을 얘기하지도 못하게 하는 치밀하진 멋진 신사양반들과 신문방송학 및 방송윤리위원회에서 그 규칙을 정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사람들에게 (만일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좋은 일이 되는 건가? 그나마 글로 확실하게 쓰여있는 시청자의 의견 (기껏해야 몇천건?) 몇개를 요약하는 데도 이렇게 잡음이 많을 수도 있는데..."국민의 뜻"을 어떻게 쉽게 요약하겠소이까? 하긴...국민의 뜻을 "보기편하게(!)" Index 식으로 만드는 관행들은 있지만서도 (ex. 표수...만족지표...각종 여론조사들...etc.)...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관행들, 즉, "국민의 뜻"을 어떤 형태가 있는 가시적인 것으로, 그럼으로써 그것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그러한 대상으로, 즉 docile object로 만드는 여러가지 (그렇다 복수이며 다양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심지어는 방송사 토론프로그램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가) 관행들 (정치시스템 및 정치관행들도 이것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대표적인 기제들 중 하나라고 보이는데, 그게 제일 중요하던 둘째로 중요하던, 혹은 정치 시스템 자체의 재생산을 위한 정당화이 기제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던(?) 일단 그것은 미루어두고 말이다.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서 국민의 뜻으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 정치집단은 지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왜곡의 수단이든 무엇이든 모두들 이 국민의 뜻을 읽는 절차와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는 거의 예외가 없는듯...심지어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서도...투표는 하니 말이다.)이 흥미 있어진다.아! 참 "데모"도 있군...데모는 심지어 물리적으로(그래서인지 참여자 숫자를 세는 방식들이 상이할 때도 많다. 참여자들을 애써 세부적으로 분류하려는 애처러운(?)노력도 있을 때도 있고 말이다.), 꼭 셀수 있는 숫자로 추상화하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심지어는 산술적인 숫자가 표현하기 힘든 그 "분위기"(예를들면 얼마나 열띈지)까지 가늠가능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데모대들 개인들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그 무엇인가의 산술적인 합이, 또는 그들의 가장 최소한의 요구가, 혹은 그것들의 공통분모가 그들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그 개인들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것이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으므로...이른바 슬로건이라는 것이 재차 그것들을 요약해 주기도(?)한다. 하긴...통합(?) 슬로건(이걸 놓고 이런 대규모의 데모를 조직한 조직위(?)는 밤을 새며 토론과 논쟁을 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이 없어 그저 (그 어떤 이유에서던 사그라들기 전까지!) 애매한 나머지 학자들과 논객들의 의미갖다붙이기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적지않이 보아왔지만 말이다.
2009년 6월 30일 화요일
2009년 6월 26일 금요일
그 날 그 장소에서 무슨일이 있었는가? 증인과의 뉴스인터뷰 (그리고, 이슬람국가(?)에서의 여성의 지위(?))



자신의 음악선생님과 데모대열에 합류(?)했다가 총탄에 맞아 생을 마감한 Neda라는 이란 소녀(?)가 죽어가는 모습이 Youtube에 공개되었을 때 보았었는데...차마 그 끔찍한 광경을 블로그에 링크를 걸수가 없다. 여기 그 비디오에서 Neda를 살리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 며칠 만에 그 모습을 언론에 드러내었다.
Neda가 여성이어서 자연스레 이와 연관된 착상이 뒤를 잇는다. 이슬람 국가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이곳 독일에서 접해들은 (많은 부분 터키사람들의 행동과 결부되어서 접하게 된다.) 많은 부정적인 이야기들, 즉, 정혼남과 결혼해야한다던가 그렇지 않으면 심지어 자신의 가족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던가...온몸을 천으로 가리고 다녀야 한다던가, 남편의 폭력에 일방적으로 시달린다던가 이런 이야기들...) 이야기들과는 달리 Youtube에 올라온 비디오 동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데모대열에 동참하고 있으며 나아가 경찰을 구타(?)하는 용감한 행동(?)도 보인다.
물론 그 여성들이 어떤 사회적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 (쉽게 교육수준, 중산층?, 가족관계 뭐 그런 것들)인가를 알도리는 없지만서도...전근대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핍박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이슬람 여성상과는 글쎄...뭔가 달라보인다.
하긴...여기서도 머리에 Kopftuch (이거 아랍어로, 혹은 이슬람 신자들 사이에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는지도 아직 모른다. 이정도로 자칭 사회학을 하는 나도 이에 무지하다...)를 쓴 여성들이 비록 여름철에도 긴팔과 긴 바지 및 치마를 입는 경우가 많지만서도 특히 젊은 층의 경우 몸에 완전히 붙어서 결국은 몸매가 다 드러나는 그러한 차림으로 다니는 것을 많이게 된다. 몸에 장신구를 화려하게 하고 멋지게 화장을 하고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하긴 서구의 종교라는 기독교도 카톨릭과 개신교로...또 개신교도 그 안으로(?) 들어가면 신의 뜻에 따라 사는 (다르게 표현하면 기독교 인으로서 사는것을 accountable하게 하는) 차별화된(?) 수많은 형태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내가 사는 빌레펠트 변방지역에서 혹 말로만 듣던 몰몬교도들(아니면 아...주...보수적인 개신교의 한 분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젊은 여성들을 보게될 때가 있다. 이들은 날씨가 덥던 뭐하던 항상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에 역시 목까지 잠근 칼라가 달린 긴소매 블라우스를 입고...꼭 (여자들끼리) 몇명이서 같이 다닌다. 기독교가 그러하다면 이슬람도 그 안으로(?)들어가보면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기 힘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도 안다고 해봐야 Max Weber 님이 쓴 글을 통해서 사회변동(?)과 관련하여 소개된 (주로 일부 분파) (맨날 얘기가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샌다...TT) 일부분 뿐이지만, 이슬람쪽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지구 위에 사는 그 많은 사람들이의 원리로 삼고있다는 (그렇게 전해들은) 그 종교를 말이다...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사망한 사람들 얘기가 나올때마다 거의 매번 거론되고 있는 Basij이라는 (정체불명의?) 낯선 조직. 경찰도 아니요, 군대도 아니면서 그런데도 현 집권세력과 관련되어 있는 이 조직. 이 조직에 대해 Wiki에 여쭈어 보았다.
경찰(?!)이 누군가를 구타하자 경찰을 발로 가격한 여성...이 이후에 이 여성은 경찰들(?!)에게 수차례 가격을 당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관련하여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편집한 영상물들
첨가: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그리고 서구식의 언론을 통해서 뉴스를 접하는?) 내 눈에 "보이면" 다른 이의 눈에도 보일법 한것 (:)) Spiegel Online 기자의 눈에도 이 이란 여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나보다. 이 이자와 내가 다른 것이 있다면...이 기자는 이것을 써서 돈을 받는 다는 것과...TT. 세칭 전문가들에게, 혹은 관련된 사정을 잘 알것같은 자들에게 질문질을 해대는데 용이한 위치에 있는 정도라고 할까?...아! 그리고 기자는 나보다 더 유식(?)했다. 그래! 챠도르 였다...그 머리에 쓰는 천은...TT)
"마"선생님 별세



몇시간전부터 Spiegel Online의 대문페이지는 마선생님에 대한 소식으로 도배중이다. 아무래도 Spiegel Online 편집관계자가 마선생님과 무슨 각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첨가: 나중에 보니...TV도 난리가 아니었다...마치 뉴스거리가 없어서 누구 만나고 헤어졌다는 허접스런(?아니다 이렇게 얘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또 언론의 기능(?)이 아니겠는가?) 소식만 전하다가 큰 사건을 반기기라도 하는양...아님 독일 방송계랑 마선생이랑 무슨 정말 큰 뭔가라도 있는 건가?)
마선생의 음악과의 만남은 중학교 1학년에 학교의 지도층 학생들(:)) 및 선생님들과 함께 했었던 설악산 수련회때였다.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했던 워크맨 (혹은 (아마도) 대우 마이마이)에 어떤 3학년 선배가 그의 카세트 테잎을 가져왔고 그의 음악은 마구 흔들어대는 손전등으로 조명을 대신했던 중학생들의 밤을 달구기에 충분했다.
당시 밤늦게 볼 수 있었던 AFKN의 MTV를 통해서 그의 뮤직비디오들을 볼 수 있었고 (당시 우리집에는 비디오 레코더가 없었다.TT) 그 후 그의 음악과 댄스는, 특히 댄스는 그 이후에 나온 플래쉬 댄스 (Flash Dance)라는 영화를 통해 소개된 Break Dance와 함께 (많은 동료 중등생들이 제니퍼 빌즈라는 여배우에게 관심을 더 가졌으나 나는 그 영화에 간헐적으로 나왔던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흑인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약 2년간에 걸쳐 조립식 프라모델과 함께 나의 여가시간을 점령했었다. 급기야 중학교 2학년때는 달밤에 마당에서 춤을 추고 있는 (정확하게 말하면 동작 연습을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걱정하신 나머지 어머님께서 담임선생님을 방문하시어 이에 관해 상담을 하시는 일도 벌어졌을 정도였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음악담당 교사셨는데...역시 음악과 공연을 이해하시는 분이시라 큰 꾸지람을 듣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연습하라는(:)) 조언(?)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ㅎㅎ.
아마도 이때 익혔던 기본적인 동작들이 그 꽃을 피웠던(이렇게 언급하기는 참 뭐하지만...ㅋㅋ) 시점은 고등학교 2학년때 당시 솔로가수로서는 거의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대한민국 댄스황제 (!) 방남정형님 (:))이 데뷰하고 활동하시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마선생님의 움직임과 Break Dance의 기본적인 움직임과 스텝들을 잘 섞은(?) 남정형님의 안무는 곧바로 몸에 붙게 숙지되었고 어떤 계기엔가 (아마도 당시 어떤 수련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료 고등생들에게 이것을 시연했었다.(:)) 고삐리 특유의 치기가 여기에 섞이면서 당시 개방되기 시작했던 (?) 대학로로 다른 친구들과 진출(?)하여 교복 바지에 상의만 교복이 아닌 평상복으로들 갈아입고 금지된 가벼운(?) 음주와 함께 둥그렇게 둘러앉아 그 가운데서 정말 십수차례 공연(?)을 했었다. 이게 심지어는 재수를 마치고 입학한 대학생활에까지 이어져서... 신입생 환영회때 어느 선배의 도발(?), 즉 남정 형님의 안무를 욕되게 하는듯한(:)) 춤사위에 발끈하여 선보인(:)) 춤들을 결국은 졸업할 때까지 보여줘야만 했었다. 일종의 인테넷 용어로 굴욕의 역사가 마선생님 음악 및 춤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렇게 10대 20대의 추억과 함께했던 인물이 세상을 떴다는 것은 참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활동을 실질적으로 중단하고서는 수 많은 지저분한 스캔들들이 끊이지 않았었고 그를 통해서 뉴스거리가 되었지만 어쩌면 그가 그의 몸으로 보여준 것은 많은 것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지 않나라는 재평가도 해보게 된다.
대중음악인으로서 그가 남긴 것들은 논외로 하고 사회학을 하는 자로서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다. 그는 인종적으로는 흑인으로 태어났지만...수많은 시술을 거쳐서 그 외양과 심지어는 피부색까지 다른 인종 (꼭 백인이라고 하기도 그렇다.)으로 바뀌었다. (첨가: 그를 추모하는 방송들을 시청하다보니 이렇게 손을 많이 대게 된 주요한 동기가 그를 스타가 되도록 조련질 했던 아버지를 닮지 싫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가슴아픈 사연이다.) 외과수술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주어졌다고 여겨지는 "성"을 넘어서는 사람들과 비견될 수 있을까? 심지어는 그의 목소리까지도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즉 성인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니며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런 것이었다. 아뭏든 (절대 불변해보이는) 범주를 넘어서려는 (그러다가 그는 제3의 인종이 되었다?) 어찌보면 그의 애처러운(?!) 그의 투쟁(혹은 기이한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결코 작지 않은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다.
특히나 요즘 이른바 문화콘텐츠의 수출(:))혹은 해외진출이라는 이름을 걸고 "장벽넘기" (이게 문화적인 것이던 무엇이던 간에)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는 마당에 마선생의 행보는 그 어떤 끝까지 간(?)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장벽넘기는 장벽을 넘어 장벽의 저편에 적응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그 장벽위에서 혹은 허물어진 장벽의 한켠에 자리를 잡고 계속 망치질을 해대는 그런 모습(어떤 사람들은 이걸 잡종, 혹은 Hybrid라고 쉽게 이름을 붙이더구만...ㅋㅋ)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나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
(추가: 마선생 별세와 관련한 온라인 상에서의 추모의 물결(?) 형성과 관련한 Spiegel Online의 기사를 뒤늦게 첨부하였다. 기사의 내용중에 아주 흥미로운 통찰(?)이 있다. Web 2.0미디어들이 실시간 Interaktion의 매체임과 동시에 (다소간 일방향적인) Broadcasting의 매체 (혹은 Verbreitungsmedien)의 성격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인데...이와 관련하여 특히 이 미디어를 통해서 벌어지는 일견 지극히 사적이어 보이는 Interaktion상에서 당사자들이 어떻게 잠재적인 청자 혹은 독자 혹은 관중을 향한 Orientation을 보이고 있는지 그 흔적(!)을 찾는 작업을 한번쯤 해봄직 하다. 물론 미디어를 통한 Interaction 보다는 대면 (정확하게 말하면 대면이라기 보다는 특정한 social situation을 시, 공간적으로 공유한 상태에서 벌어지는...사실 이렇게 social situation이 주어진듯 상정하는 것이 Goffman에 대한 비판의 지점이 될 수도 있 는데...) Interaction을 염두에 둔 주장이기는 하지만, Erving Goffman이 화자와 청자 혹은 화자와 Adressat로 Interaktion의 당사자들의 역할을 이분법적으로 범주화하는 것이 큰 문제가 있으며 각각의 카테고리들을 좀더 세분화하여 분석할 것을 요구한 것이 상기되는 부분이다. 특히 그가 Participation Framework을 논하는 부분에서 청자를 ratifiziert된 청자와 몰래 엿듣는 자들과 그리고 우연히 듣게된자들 등등으로 세분화한 것과 화자 역시 그저 스피커처럼 남의 말을 옮기는 자(animator)와 그 말을 만들어낸자 (author)), 그리고 그 말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자 (principal)등으로 세부적으로 분석적 칼날을 가져다 댄 것이 이 미디어를 통해서 벌어지는 Interaktion의 분석에도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는지 시도해볼 만한 그런 작업으로 보인다.))
마선생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무대와 복장...Billie Jean...값싼 버젼, 혹은 저렴버젼으로 항상 벙거지 모자에 목장갑 한짝 그리고....걷은 바지에 흰양말에 검은 구두가 수학여행 및 수련회등에 빠지지 않는 아이템중 하나였음...ㅎㅎ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전문인들에 대한 비전문인들(?)의 평가



1990년 대학을 입학했을 때 선배들을 옆에 모시고(:)) 수강신청을 준비하던시절 많이 오갔던 얘기...이 수업은...이 선생은...요건 들을만...점수잘주고....이런얘기들...비공식적이지만 선생을 평가하는 얘기였다. ...기억하기로 1996년 대학을 졸업하던 시점에 당시 학생들 사이에 강의평가(!)가 교내에서 운동의 이슈를 찾던(?!) 학생들 사이에 이슈화 되기도 했었다.
또...병원이 그 분야에서는 ...병원이 좋다더라...선생 병원을 한번 가봐라...그 당시에,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의원님들 (:))에 대한 평가다. 그런데...이게...그 이야기들이 유통되는 경로 (거창한 말로 미디어)가 바뀌면서...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기사에도 나와있듯이 학교 선생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를 실을 수 있다는 사이트 spickmich.de 에 대해서 한 학교 선생님이 소송을 걸면서 문제가 되었고. 이 문제가 이곳 독일에서 민사소송에서는 최고 법원이라고 할 수 있다는 Bundesgerichtshof에서 바로 어제 최종적인 결정이 떨어졌다. 합법이라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학생들은 이와 유사한 온라인 선생평가 사이트에서 익명으로 자신들의 선생들을 평가할 수 있게된다. 원고측은 이제 헌법소원을 준비중이라고 하는데...아뭏든 이 판결과 관련해서 역시 다른한편에서 보험회사로서 고객들을 위해(?!) 의사들에 대한 정보공유 차원에서 의사들에 대한 진료경험 평가사이트를 운영하려고 했던 AOK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듯... 독일 의사협회에서는 이 비전문가인 환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진료의 질에 대한 평가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에 강한 반대를 표명했다고 한다.
이전에 구두로 이루어져왔던 (즉,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던) 전문가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그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단지 웹사이트가 휘발성의 음성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것 만으로도 전혀 다른 가능성이 열리는 것인데...어떤 상황이 가능할 것인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물론 직접 들여다 봐야겠지만...ㅎㅎ) 또 그 표현의 방식 (친절한 (:)) 듣는 이에게 맞추어진 구체적인 묘사에서 보편적인 불특정의 잠재적 수강생 및 환자들을 대상으로한 스칼라 상의 점수로...일종의 투표처럼...)에 있어서의 차이가 그로부터 도출되어 나올 가능성이 있는바,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비전문인(?) (누구는 소비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의 전문인(?)에 대한평가는 Nethnographie를 하는 자들에게 흥미로운 현상일 수 있겠다.
좀더 일반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단순히 현상적인 차원에서...."일반인들에게 의견이나 그들이 어떤 사건이나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 물어봐대는 경향(!)"이다. David Silverman과 같은 사람은 Interview Society라는 개념을 사용해가면서 다소간 (?) 사회학적으로 이 경향에 접근하기도 하는데...무엇보다도 전문인들에게 물어봐대는 경향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관행임에 분명하고...이 "(마치 대표성을 띌듯한, 혹은 모아서 평균을 내면 뭔가 보편적인 의견을 대표해줄 듯 한") 일반인의 눈에 비친(?), 혹은 그들의 경험속에 남은(?) 무엇인가를 가치있는 정보(혹은 적어도 그럴 잠재적인 가치가 있을 수도 있는 것!)로 간주하는 그러한 경향이다.
일부 평가내리기를 좋아하는 진단쟁이(!) 논객이나 (심지어?) 학자들도 이에 대한 미화(?)에 나서기도 한다.
물론 좀 과장된 묘사일수도 있겠으나...먼 과거에는 특정한 사건이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신탁을 통하여 (혹은 기도를 통하여) 신에게 묻거나 혹은 우주의 법칙(점성술...예를들면)에 묻는 그런 방식들이 채택되었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일반인(?)에게 물어봐대기"는 요즘(혹은 현대적?) 주술의 한 형태인가? "개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대중의 지혜(?)"는 사회조사기관이나 언론 및 사회과학자들의 인터뷰라는 의례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잡히지 않는 주술적 존재이고 말이다. (좀 너무 비꼬는 투가 되었는가?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말이다. ㅎㅎ)
2009년 6월 23일 화요일
삶과 죽음을 결정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존엄사라...(이름 참...이전에는 안락사라고 하지 않았었는가?)
첫케이스라고는 하지만...거의 이 어르신의 사망(?)에 이르는 길을 생중계하고 있다...(...)
이게 인간과 관련한 수많은 전제들과 실제적인 활동들이 얽혀있는 문제라...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의학적 규준 (이것도 특정한 문화적 규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및 여타의 규준들이 고려될 것이고 때로는 이것들 사이의 충돌이 있을 수도 있을터이고.
인간의 생명을 유지 내지는 심지어 연장할 수 있는 수많은 도구들이 나와있는 상태에서 "자연상태에서의 주어진 삶"과 "인위적으로 유지되는 삶"사이의 경계를 지을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이면서...
"인간답게" 또 그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당하지 않게"사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 애매한 문제에 대해서 정의를 강요당하는 상황이기도 하며....(어른들이 먹고 싼다고 인간이냐는 말을...혹은 저녀석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도 하시고...)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신체를 처분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또 그 권한(?)을 행사할 주체(?)가 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규준에 대한 정의를 강요당하는 상황이기도 하며...
나아가 실제로 "죽음"을 다루는 사회제도 및 조직의 활동과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한 ethnomethodology적인 연구로는 David Sudnow의 Passing On이 있다. 이 연구에서 그는 병원의 응급실과 시체안치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그야말로 "임박한 죽음" 및 "죽음"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당사자들의 활동을 ethnographic한 방법을 사용하여 관찰하고 분석하였다. 기억하는 자못 충격적이었던 지점중 하나가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가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지 아니면 회생가능성이 있는 환자인지, 다시말하면 회생을 위한 시술을 할 가치가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적용되는 기준이었다. 단순히 진단을 위한 기계들을 통해서 나오는 (객관적) 수치들 만이 그 최초의 운명적 판가름(!)을 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 거기에 그 환자가 누구인가(그 환자가 어떤 사회적, 신체적 카테고리에 속하는가, 그 환자가 어떤 상황을 통해서 이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식별하는 해당 의료요원들의 일상적 지식 혹은 상식(!)이 이 중요한(?)판단에 개입된다는 것이 Sudnow의 작업에 의해서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다.) (추가: 다시 말하면 이 Sudnow의 작업은 Ethnomethodologist들의 많은 작업들이 그러하듯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예를들면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문제...) 보펹거인 그 어떤 해답을 찾으려는 고매한 작업 (철학적인, 윤리학적인...etc)을 그 질문을 실제로 다루는 기존의 인간의 활동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생사의 가능성을 가르는 (가늠하는?) 활동이나 죽음을 실제로 다루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들여다 봄으로써 새롭게 접근한다. 그 구체적인 맥락속에서 이루어지는 해당활동은 다시금 다른 (?!) 구체적인 맥락 (ethnomethodologist들에게는 철학 및 윤리학적 추론들도 그에 속할텐데)에서 해당주제가 어떻게 다루어지는 지를 돌아보는 (!) 일종의 발판의 역할을 한다.)
이곳 독일에서도 이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을 어떻게 처우(?)해야하는지를 놓고서 상당한 의견차이들이 있는데...어제였던가? WDR5에 청취자로서 전화한 어떤 어르신은 단호하게 당신은 침대에 식물인간으로 누워서 다른 사람에게 못할짓을 시키고 못보일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시겠다고 말씀하시던데...벌써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일이 큰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죽음"이 단순한 개인의 판단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 현상이라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긴...벌써 그 어르신께서 다른사람에게 못할 짓, 혹은 다른 사람에게 못보일 모습이라고 하신것도 벌써 그 어떤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아마도 문화적인) 특정한 규준에 비춘 (아마도) 예상가능한 당신의 모습이니...
그러고보니..혹 내가 알고(?)있는 문화권(?)에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자들의 세계 사이에 무언가 어정쩡한 세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그리하여 한동안 죽은자를 마치 산자처럼, 마치 우리들 안에 계속 있는 것처럼 대우해주는 것은...이 애매함(?)에 대한 일종의 해결책(?)인 것인가?
2009년 6월 22일 월요일
이란의 국가권력구조 (?): 종교와 정치

도식적으로 정리된 이란의 국가권력구조(?)
그...각각의 자리(역할이라고 해야할까?)를 차지할 인물들을 거르는 절차가 사뭇 낯설게 느껴짐...국민투표 (보통선거)를 한다고 모두 같은 (거기에 형식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던 실질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던 간에...) 정치시스템(?)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것으로 보는 것은 실제로 큰 문제로 느껴진다. 예전에 호메이니(옹, 왜 맨날 옹을 붙였을까?) 시절, 다시말하면 이란 (이슬람)혁명이후 실질적인 권력은 종교적 수장(이들을 종교적 수장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이데올로그라고 해야할지...참...서구적 개념으로 범주화하기조차 무리스럽다. :))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셈인데... 매...우....흥미로운 필터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 그것의 구분이 없던 상황을 함 유추해 보려고 궂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을 수도(?)있을 듯...(:))
이란 전문가중 누군가가 지금 현재 Opposition에 있는 무쟈비가 대통령 자리를 넘겨받아다손 치드라도 이란의 전체적 기조는 달라질 바가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주워들은 적이 있는데...이 조직도를 보고있자면 그럴법도 하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현재 무쟈비를 지지하는 자들은 저렇게들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가? 그들의 뜻은 무엇인가? 그들은 진정 개혁주의자(? 이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서구 국가들 시각에서의 분석도 각양각색인데...)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개혁의 내용은?...길거리에 나와있는 사람들은 나아가 지금 이 시점에 이란 거리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그 뜻을 (옳게던 왜곡되게던 그 어떤 형태가 되었던 간에) 모아낼 그 어떤 장치도 적어도 현재로서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과연 누가...그 모아내는 장치를 운영하고 있으며, 혹은 그 장치를 새 장치로 바꿀 그런 계획을 내놓을 것인가? 직업 정치인 (혹은 정치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들 이외에 다른 담지자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말로 들으면 좀 더 이해가 쉽다....
그런데 왜 자꾸 이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하는 이 학생의 노트북이 눈에 들어오는 것인가?...ㅎㅎ
2009년 6월 18일 목요일
Roboter ohne Kopf
어쩔때는 나이브하다고 흔히 욕을 먹는(?) 컴퓨터 과학자들이 (웬만한) 인간에 대해서 쉽게든 어렵게든 떠들어대는 철학자 혹은 사회학자들보다 나아보일때(?)도 있다. (:)) 특히 그들이 인간의 cognition과 관련해서 고민한 흔적을 보여줄 때 말이다. Rodney Brooks의 이 인터뷰는 인간의 embodied practice들을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기존의 사회학자들에 익숙한 문화 및 구조결정론(축약하여 말하면 문화 및 행위구조가 인간의 뇌에 프로그래밍 되며 그에 의해서 인간의 행위가 조종된다는 견해)과는 다른 접근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일견 지극히 주관적인 상태로 보이는 Intention은 시스템(그것이 컴퓨터가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의 "실제 내적인 상태"로 환원하여 확인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 및 성향들을 뇌의 사진을 찍어대서, 즉 뇌의 물리, 생리적 활동, 다시말하면 시스템의 상태로 환원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주류(?)에 속한 연구자들은 이 사람의 말에 한번 주의를 기울여봐야 할 듯. Intention은 내적인 어떤 상태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라기 보다...오히려 특정 행위(좀 더 정확하게는 움직임, 혹은 안움직임 :))들을 맥락지우고, 그 행동의 담지자의 정체를 그 맥락속에서 정의내리는 그러한 활동(프랙티스...사실 이 활동이 더 미캐니컬(:))하고 구조적이며 상당수준 조직되어있다고 볼 수 있는데...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이 Conversation analysis와 ethnomethodology의 핵심적인 발견(!)이라고 볼 수도 있다.!)들을 통해서, 즉 특정 행동에 대한 의미형성 작업 (그렇다 작업말이다. 이 작업은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더 질서잡한 그런 것이고 그저 "사회적 구성"이나 "구성"이라는 한 단어로 넘겨버리기에는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 볼 것이 요구되는 그러한 활동이다.) 을 통해서 갖다가 덮어씌워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좀더 (사실에) 근접한 설득력 있는 설명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예를들어 심리학자들은 행위 및 행동의 동기를 밝혀내고 그럼으로써 뒤집어 씌우는 (그게 명시적이든, 혹은 잠재적이든, 혹은 심지어 무의식에 의해서 조종된 것이든) 특화된 방식들을 발전시켜왔다. 이 방식은 흔히 보는 인터뷰에서 각종 테스트에 이르는 그들의 실천(!)을 망라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검사 및 변호사들의 활동으로 대변되는 법적인 맥락에서의 동기 덮어씌우기가 제도화된 방식이라고 쉽게 얘기될 수 있는 것일 수 있겠다. Conversation analyst들의 몇몇 연구들에 의하면 이들 (특히 정신과의사들과 검사 및 변호사들의 경우)은 흔히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질문과 답변의 연쇄들 중 특정한 형태를 사용함으로써 (즉, 그것을 일종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피질문자들의 답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대한 display를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것을 통해 피질문자가 그 display된 질문자의 답변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자신의 답변들을 수정하거나 보충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 답변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독점(좀 유하게 말하면 해석을 자신들에게 속하도록:))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질문과 답변이 sequenziell하게 조직되는 특정한 방식(메커니즘)을 채택하는 것이 이들의 "동기부여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또 쉽게 얘기하는 전문가의 권력(sic!) 을 가능하게 하는 그럼으로써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관계를 재생산하는(즉,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그러한 핵심적인 활동들 중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2009년 6월 16일 화요일
내 표는 어디로?: 이란 국민들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 국민의 뜻(?!)을 읽는데 엄청나게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또 하나의(?!)나라가 있다.
천차만별일 국민의 뜻을 산술적인 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모으고 대변(?)해 준다고 믿어지는 방식인 국민투표(보통선거)! 산술적인 표의 수집과 합산과정에서 벌어졌다고 주장되고 있는(?) 부정과는 무관하게...
Mussawi의 지지자들과 현정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이 소위 국민의 뜻을 모은다고 하는 관행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는듯!
현재 이란의 공식 관변언론을 제외하고 일체의 외국언론들의 취재 및 보도가 금지되고 심지어 여타의 통신수단들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가운데...
이번 선거에서 이란에서 선거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적지않은 역할을 했다는 인터넷 매체들이 또 그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 데모를 조직하는데 이 매체들이 이용되고 있으며, 개인들이 찍어 Youtube등을 통해서 뿌리는 동영상들과 Twitter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짤막한 소식전하기들이 현재 그곳의 분위기를 전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모양인데...언론이 넷 상을 떠도는, 그리고 그를 통해서 확산되는 이들 개인들의 소식 및 경험을 인용하고, 다시 이 언론에서 언급된 이들의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되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란에서 있었다는 인터넷 선거캠페인과 관련된 CNN 발 소식
:)
현재 이란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및 어떻게 데모를 조직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웹기반 통신매체를 통해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Spiegel Online의 기사1. 기사2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2009년 6월 9일 화요일
Online Journalism에 관하여





논객! 이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몇마디로 정의내려 버리기란 쉽지 않다. 때로 이들은 마치 일어난 사건에 대한 논평만을(!) 덧붙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내러티브들을 생산해 냄으로써 어떤 사건에 대한 보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기존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전하는(?!) 주요 매체들이 담당해왔던 역할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듯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인터넷 매체의 출현과 관련없이 논객들이 있어왔지만...기존의 논객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한마디로 언론매체 및 그 어떤 형태가 되었든 고전적인 형태의 출판매체들이었던 만큼 이른바 논객이 되기 위한 문턱은 사뭇 높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인터넷, 특히 이른바 포털사이트들에서 제공되는 토론방과 개인블로깅이 그 문턱을 낮추어줄 수 있는 기술적 가능성(오직 가능성이다!)을 제공하게되면서 이른바 논객(!)으로 등단할 수 있는 길이 용이하게 보이기도 한다. 얼마전에 검거(sic!)되었던 필명 미네르바의 경우에도 어쩌면 이 기술적 가능성이 제공한 전형적인 예 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뭏든지간에 이 논객들은 (본명이 되었든 필명이 되었든, ID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무언가에 대해서 (정치적인 이슈로부터 어른들의 장난감이 될만한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불특정 다수의 독자 혹은 Audience들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거나 써대는 사람들이다. 이들 이름을 걸고 써대는 자들은 언론의 공공성이니, 중립적인 사건보도니 이러한 족쇠(?)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나 이른바 "주관적" (이 "주관"의 주체가 글자 그대의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개인(sic!)인지 혹은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틈이 나면 논하기로하고) 입장들을 첨가해 넣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용인된다. 이름을 걸고 하는 얘기므로....
이러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있다) 전통적인 매체인 신문을 예로든다면, 이름을 걸고 이런 활동을 한 사람들은 논설위원들 및 칼럼니스트들이고 (이들은 심지어 그 얼굴이 사진으로 그들이 쓴 글의 상단에 게시되곤 한다.), 이름을 빼고 마치 신문사의 대리인인양 무명으로 이 일을 하는 평기자(?)들은 앞서도 언급했이들이듯이 언론의... 라는 류의 족쇠에 매여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른바 취재(!)한 글들의 경우에는 그 이름이 기사의 상단이나 하단에 게시된다. 그러나 이들의 얼굴이 게시됨으로써 그 정체(!)가 밝혀지는 경우는 드물다 하겠다. 그리고 연합뉴스처럼 뉴스를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배급하는 업체(:))들의 기사가 인용되었을 경우에는 누가 그것을 인용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적어도 인터넷 상의 언론사들 지면에서 이러한 기존의 활동패턴(?)에 있어서의 변화(?)가 목도된다. 스크랩된 한겨레 온라인의 경우에는 취재기사의 상단에 기자의 이름들이 밝혀져 있고 이것이 다시 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링크되어 있다. (회원 로그인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실질적으로 바로 접근 가능하다.) 유비하자면 뭔가...무대 앞에서 공연한 연극배우를 바로 무대 뒤의 분장실(적절한 유비는 아니다...블로그도 역시 대중을 염두에 둔 공간이라는 면에서...그냥 사인회라고 할까? 어쨌든 극중 역할과 연관은 되어 있으나 극중의 일부인 역할이 아닌 배우로서 사람들과 만나는 맥락이라는 면에서 말이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형국이랄까? 지극히 (적어도 수사적인 측면에서라도) 객관적인 (즉, 마치 everybody 혹은 Jederman 의 시각으로 본 듯한 그런...) 사건에 대한 기술(?) 이면에 지극히 주관적 (?)인 것으로 보이는 세상사에 대한 접근 (블로그에서는 허용된?)을 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공되는 셈이다.
어찌보면 신문의 기사들을 성의껏 잘 퍼나르고 거기에 논평을 붙이는 이른바 특정분야 전문 블로거들 (이들이 동시에 논객이 되기도 하는데...)의 활동과 이들 언론의 온라인 섹션들 사이의 일종의 수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언젠가 지금 이 블로그가 "혈거인"이라는 (자괴적인) 타이틀을 걸고 있던 당시에 쓴 글에서 유명 칼럼니스트들이 온라인 언론에 일종의 블로그 형식으로 (그것도 멀티미디어로) 기고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는데...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정보들을 수집하고 가공하고 배포하기 위한 거대한 인적 물적 조직(!)으로 표현되는 미디어와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 한대를 가진 개인(!)이 결과적으로(?) 같은 짓을 하고 있다?? (그렇다기 보다는 다른 글들에서 누차 언급되었지만 일어난 사건들과 사실들에 대한 진술에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해 먼저 논해야하겠다. 그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오랜동안 누적된 관행(?)이 없다면 뭐 사실 재구성을 위한 방대한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가진 언론이 생산해낸 그것이나 집에 앉아서 인터넷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한 개인이 해낸 재구성이나...그 재구성들(?)을 마주대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그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Spiegel Online의 기사에 언급되어 있듯이 이 "이름을 걸고"이야기 해왔던 (유명) 칼럼니스트 및 언론계 종사자들이 역시 그들의 이름을 걸고 말하자면 일종의 백화점 내지는 슈퍼마켓에서 특정 상품 그룹의 매장을 분양받아 자신들의 브랜드 부스를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뉴스 컨텐츠들을 방문하는 독자들에게 판매(?)하는 일종의 실험적인 뉴스 미디어가 온라인 상에 등장했다고 한다. 과연 이들 왕년의 스타들이 그들이 뉴스를 생산해내는 조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도, 즉, 한 개인들로서도 권위있는 (?) 이야깃 거리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계속)
2009년 6월 4일 목요일
머리에 떠올리는 것도 안된다.
20년전 오늘이 "천안문 사태"로 알려져 있는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중국당국이 천안문에서의 기념식은 고사하고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자국인들 및 타국인들까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벌이는 일들이 참 가관이다. 취재를 막기 위해서 우산을 동원하다니...(요즘 대한민국의 정권을 잡은 자들도 그 근본적 착상에 있어서 별반 나아보이지는 않지만...) 취재진들이 천안문 근처를 찍는 것을 막는 동시에...당시 사건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가택연금을 해 놓은 상태라는데...
얼마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 전 대통령 건도 그렇고...또 공교롭게도 (?) 세칭 "6월 항쟁"으로 불리우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일컽는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던 대한민국에서도...기념일은, 특히 기념일을 기해서 "...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그것을 개개별 인간들이 뇌속에 어떻게 재구성하고 있는가와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으로, "어떤 특정한 잘 정의된사건에 대한" "집단적, 나아가 그 어떤 공통의 기억"이 있다는 것 (혹은 있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간주관적으로 (Intersubjektiv) 확인하게 해주는 그런 도구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인간의 머리속까지 검열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이 (아마도 존재하리라 생각되는) "공통의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 중국당국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방어책일듯...(현 한국 집권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각도 같은 생각일듯...)
정말 아쉽고 또 놀라운일은 서방 방송의 카메라 앞에서 20년전 자신의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른다고 얘기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었다. 기억속에서 잊혀지는 것...차라리 왜곡되게라도 남아있느니만 못하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2009년 6월 2일 화요일
우리도 (한국도) 쏜다 (:))
오는 7월 말 전남 고흥 발사센터에서....자체 기술이라고 얘기하기는 그렇지만...러시아 양반들이 많이 도움을 주었지만...아뭏든...발사와 관련한 경험을 쌓는다는 측면에서...ㅎㅎㅎ
얼마나 진전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2012년 지금 ISS에 결합되어 있는 일본의 실험실 모듈인 Kibo를 실험목적으로 사용하는 협상이 일본측과 추진되고 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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