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이번에는 거주지인 Bielefeld를 말함 :))에서 현재 68운동, 특히 세부적으로 당시의 Springer 출판사 (일종의 언론 콘체른?)에 대한 반대운동과 68로 지칭되는 사회운동과의 관계를 연구하시는 역사학 박사학위를 하시는 분의 발표덕에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소개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이른바 "Springer의 몰수"를 모토로 했다는 당시의 운동세력의 주도로 (그리고 Springer 측의 주장에 의하면 경쟁사들의 지원하에) 계획되었었다는 "Springer Tribunal"이 40년이 지난 현재 아이러니 하게도(?) Springer 출판사 자신에 의해 외곡된 자사의 이미지를 바로잡는다 (?)는 취지하에 다시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와 관련하여 떠오른 생각들 중 "언론의 역할"에 대한 착상들을 정리해본다. 언제나 나의 생각들이 그러하듯이 되도록 언론은 ... 해야한다는 당위론적인 규범적 착상으로부터 일차적으로 거리를 두고, 또한 언론이 사회 전체 체계의 작동 속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 사전에 정의내리거나 개념화 하려는 경향 (이건 사회학자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향으로 보이기도 하는데...)으로부터도 거리를 두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현재 언론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며, 혹은 그렇게 일상적으로 취급되는 그런 것)로 부터 출발한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그 자체를 테마(혹은 논의의 대상)로 하여 다루게 되는 경우가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일어 벌어졌다고 당사자들(특히 특정한 사건기술과 관련된 당사자들)이 주장들을 할 때인데 이런 주장들은 사건기술과 관련한 옳고 그름(!)을 둘써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인 만큼 일종의 "논쟁과 정의하는 작업 속에서 진행되는 언론에 대한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재구성된 언론에 대한 (다소간 이상화되고 개념화된) 상은 지극히 특정한 맥락 속에서 구성된 상인 만큼 그야말로 "일상속에서의 언론" 혹은 "일상속에서 ordinary(!)하게 스스로를 구현(1)하며 또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혹은 수용되는)(2) 그러한 언론과는 적지않은 거리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의 이상화된 언론에 대한 상이 "틀려먹었다"라는 얘기기 결코 아니다. 단지 그러한 개 념화되고 이상화된 언론에 대한 상이 어떻게 하여 도출되어 나오며 또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인지를 강조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면 이 ordinary한 일상속의 언론이 보이는 (그렇다...보이는!) 면모들을 한번 들여다 본다. 글쎄...일단 언론의 이름을 달고 출간 혹은 펼쳐져 나오는 그런 것들을 한번 살펴보면...참...여러가지들을 다루기도 하고....뭐....전문화되고 특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궂이 공통점(?)을 걸러내자면...이들이 하는 짓은 "이야깃거리를 전하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일간 신문에 연재소설까지 있지 않은가?) 물론 "사실에 대한 보도"를 하는 면도 있지만 "사실"이라고 하여 모두가 다 이야깃 거리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를 사실 그대로 기술 할 수야 있겠으나 그것이 "이야깃 거리"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야깃 거리는 이야기 할만한 것일 것이고 특히 언론 매체들의 경우에는 독자들에게 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게다.
이렇게 전하는 내용과 관련하여 (특히나 식자층의 경우) 많이들 듣게 되는 평가(?!)들이 언론의 편향성 (특히 우리나라 조중동의 경우 이 이야기들 많이 하는듯...)과 언론의 색깔 (특히나 황색미디어들...스포츠 신문...ㅎㅎㅎ)과 관련한 것들이다. 이들 (비판적 식자층)의 견해에 따르면 언론은 편향성을 가져서는 안되고 또 그 색깔도 건전한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언론이 그 본연의 기능(순기능!)을 한다는 주장이 그 뒤를 잇는다. 다시말하면 언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특정한 규범적 규준에 근거를 둔 모델을 상정하고 이 모델을 잣대로 언론이라고 이름붙여지는 행 위 및 그 결과물들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전에 이루어진 언론의 기능과 그 작동에 대한 정의에 따라 현재 언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활동 및 현상들을 저울질 하고 그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동안 정작 실제 그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행위가 혹은 그 현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건너뛰게되는 일이 벌이지게 된다.
다시 "이야깃거리"로 돌아가야겠다. 이야깃 거리 중에서도 생각해보면 듣는 사람들이 아는 얘기와 새로운 소식이 있다. 실제 언론에서 다루는 이야깃 거리들 중에는 글자 그대로 News 즉, 새로운 것들이 있기도 하고, 독자들 혹은 시청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어떻게 이야깃 거리가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겠다. 일상적인 대화 상황에서도 특정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세칭 공유하는, 혹은 적어도 그럴 것이라고 가정된) 사람들 사이에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이게 질책을 당하기도 하지만 (다아는 얘기를 왜 또하냐며) 이게 일종의 "자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경우에 따라 의미 형성에 있어서 일종의 공동의 자원을 상기시켜주기도 하고, 이전 혹은 앞으로 전개될 대화의 맥락 속에서 비록 같은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이전에 그 에피소드가 거론되었을 때와는 다른 의미가 형성되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기지의 묵은 얘기들을 가지고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가doing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연구의 주제가 될 수도 있다.) 또 기존에 이야기되었던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다르게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등장 인물 중 그 비중이 달라질 수도 있으며 특정한 등장인물의 행위가 때로는 자세히, 때로는 그저 주변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인물들에 의해서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재구성은 하나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이야깃 거리"라는 표현으로 돌아가자면 기지의 사실(?)도 다양한 방식으로 (!) 이야깃 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소식은 어떠한가? 모든 새소식은 이야깃 거리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꼭 큰 사건(?)이어야 하는가? 새 소식이 되는 여건은 무엇인가? (계속)
(첨가) 또다른 방식으로는 "남이 전한 소식을 다시전하기" 혹은 인용이 될 수 있겠다. (특히 우리나라 언론들 중에서 외국 신문에 의해서 인용되는 주요신문들이 연합뉴스와 경우에 따라 조선일보가 될 수 있겠는데...연합뉴스의 경우에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랍어와 스페인어까지 지원하고 있다. 외신을 전하는 각 나라의 기자들이 물론 영어정도야 꽤 하겠지만서도 그래도 자신의 나라 말로 되어 있는 신문이 있다면 좀 더 접근이 용이할 것이라는 것은 추측가능한 바...조선일보도 다른 여타의 신문들보다 적어도 하나의 언어를 더 첨가하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띄는 일이다.)
(중략)
언제였던가...아마도 9/11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 그 어떤 언론사에서도 이 예측하지 못한 사건을 미리 준비했다가 포착할 수는 없었을테니 (비행기들을 조종한 사람들과 사전에 내통하지 않는 이상...가끔 헐리우드 필름을 보면 저널리스트들이 이렇게 내통하는(?) 장면들이 나오기도 하는데...흠)...당연지사 우연히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목격자들)의 증언이나 우연히 그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면 그들이 포착한 현장 사진을 언론사들이 인용하게된다. (이런 사진의 경우 천문학적인 액수가 지불된다는 루머도 있다.) 따라서 언론사들이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자신들의 직원이 아닌 다른 Quelle로부터 나온 자료 및 구두로된 사건의 재구성을 인용하는 관행은 계속적으로 있어왔던 어쩌면 특별할 것이 없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카메라 (요즘 핸디 카메라가 300만 화소이던가? 비디오는 아마 640, 320 그리고 초당 최대 15 프레임 이렇게 찍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를 가지고 있는 지금은 사정이 어떨까? 앞서도 언급했지만 적어도 언론사에서 그 어떤 이유에서던 (이란의 경우는 금지당해서, 다른 천재지변이나 사건의 경우에는 전문기자가 언제나 그러한 일들이 있기전에 사전에 그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사정에 의해서...) 현장에 있기 힘든 경우에도 이러한 비쥬얼한 자료 혹은 verbal한 증언들은 언제나 있어왔지 않은가? 헌데 언론에 의해 사용가능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현재는 어떠한가? 여기서 주목되는 점이 한 사건(?)을 여러 각도와 시각에서 촬영하는 것이 열어놓게 되는 (해석의) 가능성이다. 실제로 주류(?)언론에 의해서 걸러진(!) 영상물에 반박(!)이 될 만한 (그 필터링에서 의도적이던 의도적이 아니던 누락된?!?) 영상물들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즉, 기존의 언론망이 아닌, 그 비주류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하는 다른 (유사 혹은 준) 언론이나 그냥 사진,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통될 수 있는 가능성이 또한 여기에 결합된다. 즉, 카메라라는 하드웨어에 네트워크가 결합되는 셈이다. (아마도 이러한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이 영상물들은 마치 이전에 언론사에 판매목적으로 제출된 수 많은 아마추어 사진사들의 사진들이 걸러지고 나면 나머지는 대중들로서는 접근이 불가능했던 것 처럼 그렇게 개별 촬영자들의 메모리 카드에서 삭제되어 사장되어졌을지도 모른다.)
(계속)
언론은 실제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좌우할 만한 힘이 있는가?: 많은 언론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들은 언론의 편향된 시각이 사회의 특정한 이익집단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대중들에게 강요하여 일종의 왜곡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유도함으로써 그 이익집단의 이익의 재생산에 복무한다는 논지를 가지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언론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벌써 미디어 비평과 같은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입으로 언론의 지배적인 역할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하게도 언론이 실제로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 아니 최소한 그들이 대중들에게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우회적이고 복잡하다는 것 을 반증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괴변처럼 들리지만...그렇지 않은가? (이건 순전 내 의견인 것만은 아니다. :)) 많은 미디어 연구들 (특히 미디어 컨텐츠의 수용과 관련한)이 또한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계속)
언론의 생산물에 대한 수용 자체가 이야깃거리 (경우에 따라서는 뉴스)가 되다! (we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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