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6일 목요일

Practical Reasoning...


혈거인이 제2의 동굴 (집을 지칭함)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시청하는 CSI들 (복수이다. 왜냐면 CSI가 지역이름이 그 뒤에 붙어서 여러개이기 때문이다. 특집프로그램에서는 다른 CSI 시리즈들의 출연자들이 함께 출연하기도 한다...어지간히 열심히 보기는 했나보다...TT)을 보고있자면 아주 작은 증거물에서 DNA를 검출해내고 이것을 다시 센스있게 얻어낸 용의자의 DNA와 비교함으로써 자칫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을 사건을 통쾌하게 해결해내는 극적인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거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거푸집과 뚜껑이 달린 면봉이다.
허나 CSI 시리즈들에서 이 면봉이 다른 DNA에 의해서 오염 (?!)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장면은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그 많은 장면중 언젠가 딱 한번인가 본적이 있는듯 하다. 그때도 아마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했던 것 같은데...즉, 고의적인 조작이었다는 것이다.)
여기 이 면봉을 법의학 수사대에 납품한 업체가 그것을 생산하는 단계에서부터 면봉이 오염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흥미를 끈다. 더욱더 혈거인의 관심을 끄는 지점은 어떻게 경찰관련자들이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에 대한 회의 (의심:))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그 과정이다. 여기서 기사에 언급된 두번째 예가 매우 흥미로운데...여러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DNA 통해서 특정한 여성 용의자 (?!)를 추적하는 도중 이 미지의 여성 용의자가 저지른 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일관성이 없는 사건들에 사건을 조사하는 조사자들이 주목을 하게되고 (즉, 이 DNA의 주인이 좀도둑질부터 살인-거기에는 경찰관 살해까지 포함된단다-까지 저질렀다는 점) 이것이 뭔가 석연치 않게 판단이 되면서 (이것을 석연치 않게 판단하게 된것은 이미 특정한 범죄자는 특정한 어느정도 일관된 범죄 프로필을 보인다는 이론적 가정에 근간을 둔 것인데...), 그리고 그것이 일련의 다른 유사한 사례들과 겹치면서 종국적으로는 도구에 대한 의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좀 수사적으로 말하면 생물학적인 증거가 범행사실을 증명할 뿐 아니라 역으로 범행사실에 대한 (상식에 가까운) 사회학적 (또한 심리학적) 착상들이 생물학적 데이터가 가지는 증거의 지위에 대한 평가를 가늠하도록 해주는 척도로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생물학적 증거와 사회, 심리학적 정황은 서로에 대해서 Reflexiv한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또한 과학사회학자인 Harry Collins가 "Experimenter's Regression"이라고 명명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만일 실험실에서 특정한 화학적 현상을 검출하려고 사용하는 시약의 순수성 (몇 퍼센트 알코올이나 뭐 그런거라고 해두자...)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사실 이러한 방법적 회의가 과학적 추론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했던 과학철학자들도 있다.) 그 시약의 농도가 과연 원하는 농도가 맞는지 매번 확인을 한다면, 또 그 확인을 하는 방법이 적절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확인 방법을 확인한다면...이것은 악무한적인 연쇄를 낳고 결국에는 하고자 했던 실험은 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 그 논지이다. 다시말하면...세칭 가장 회의적으로 보이는 과학적 활동도 상당한 수준의 "믿음"과 "전제"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그 믿음과 전제들이 과학적 활동을 가능하도록 하는 토대라는 것이다. 면봉과 관련시켜 얘기하자면 뭐 물론 법의학 범죄수사대가 매번 혹 있을 수도 있을 면봉의 오염여부를 확인할 수는 있겠으나 (혹 그것이 Vorschrift 였다고 말하는 사람이있을 수도 있겠다.) 이 오염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DNA를 검출하는 과정에 미칠 수도 있는 영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이며, 또 일단 철저하게 회의를 가지기로 하였다면 그 오염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도 재차 그것이 오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인지를 재차 확인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한다면...정작 언제 사건 현장에서 DNA를 검출해낼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철저하게 회의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하더라도 어디선가는 멈춰야 하는 것이며 ethnomethodological하게 말하자면 for all practical purposes...충분하면 충분한 것이다...적어도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러한 지점은 또한 일찌기 Alfred Schütz에 의해서도 통찰되었는데 (물론 그가 과학적 태도를 이것과 일견 구분하는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Natural Attitude라고 했었던, 즉,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법의학자들의 직업적 일상도 일상이다.) "공동의 실재"에 대한 감각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기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제는 바로 "전제와 믿음"을 그 특징으로 한다. Harold Garfinkel 역시 Practical Reasoning을 강조함으로써 동일한 현상에 대해 통찰하였다.

아뭏든 일련의 DNA 증거와 관련된 스캔들들로 문제가 생긴양, 인간의 부주의가 낳은 있어서는 안되었을 일인양 부산스러워 보이지만...다른 의미에서 "어느정도 됐으면 넘어가기"가 무엇인가 "일이되도록 만드는데" 얼마만큼 중요한지 (아니 나아가 필수불가결한 요소인지)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다. 사실 규범이나 Vorschrift와 같은 것들은 일단 일이 잘못되거나 남들에게 자신들의 활동을 "설명가능한 것이 되도록" 혹은 "이야기 가능한 것이되도록"할때 동원되는 자원에 가깝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학 이론들이 전제하듯 인간의 행위를 조종하고 방향지우는 "원인"이라기 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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